2014년 12월 31일 수요일

유혹을 이겨내는 비결<하나님의교회&안상홍님>

유혹을 이겨내는 비결





어떤 젊은이가 온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왕을 찾아갔습니다.

젊은이는 왕에게 자신은 쉽게 유혹에 흔들리고 참지 못하니 그것을 이기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아무런 대답도 않고 자신의 앞에 있던 잔을 들어 포도주를 가득 따라
젊은이를 주면서, 큰소리로 신하를 불러 명령했습니다.

“이제 이 젊은이가 포도주 잔을 들고 거리를 한 바퀴 돌 것인데,

너는 칼을 들고 젊은이의 옆에 있다가 포도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그 즉시 목을 베어버려라!”

거리로 나간 젊은이가 진땀을 흘리며 조심스레 걸어 무사히 왕궁까지 돌아왔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거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네가 보고들은 것을 이야기해 보거라.”

그러자 젊은이는 당황하며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왕이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 시장에서 떠드는 장사꾼들의 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했단 말이냐?”

젊은이는 더욱 난처해하며 말했습니다.

“예, 저는 정말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제야 왕은 젊은이를 향해 인자한 목소리로 이렇게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네가 알고자 하는 유혹을 이기는 비결이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동안 포도주잔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못 보고 들은 것처럼,

인생의 목표에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고 노력한다면 유혹의 손길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옛적 40년 광야 길을 걷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듯이 

천국을 목적 삼고 복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도 하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시험과 유혹거리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늘 소망만을 생각하고 아버지 어머니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 길만 바라보고 따른다면

어떤 훼방과 유혹이 있을지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이 임박한 이때 그 어떤 유혹에도 고개 돌리지 않고 하늘의 것만을 바라보는 자녀가 되리라 다짐해봅니다.



<엘로히스트 중에서>

2014년 12월 30일 화요일

다름과 틀림<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다름과 틀림


일상생활 중에 자주 접할 수 있는 잘못된 언어습관이 하나 있다. 
'다르다'와 '틀리다'이다.
'다르다'는 '같다'의 반대말이고, '틀리다'는 '맞다'의 반대말이다.
영어로는 ‘different’와 ‘wrong’의 차이로 두 단어는 분명 차이가 있다.


‘다름’을 써야 할 자리에 ‘틀림’을 썼을 경우, 말의 의미는 엉뚱해지고 만다.
 ‘너와 나는 달라’와 ‘너와 나는 틀려’ 중 어떤 표현이 옳을까?
 ‘다르다’는 것은 ‘비교가 되는 둘 이상의 대상이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 쓴다.
 ‘틀리다’는 말은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릇되거나 어긋나다’는 표현이다. 
다름은 비교의 대상이 존재하는 경우, 서로의 입장이 같지 않고 차이가 나는 상태에서
 쓰는 게 맞다. 반면, 틀림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에 맞지 않고 그릇되고 어긋난 것을 ‘틀리다’고 할 수 있다. 
즉, 틀림은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의교회와 일반 기독교의 차이를 살펴보면, 
둘 다 같은 성경을 보고 있음에도 예배를 드리는 날이 서로 ‘다르다’. 
그렇다면 ‘성경’이라는 기준을 놓고 봤을 때, 둘 중 하나는 ‘틀리다’.
 하나님의교회는 안식일이라 하여 토요일에 예배를 드린다. 반면, 일반 교회에서는 
주일이라 하여 일요일에 예배를 드린다. 
또, 하나님의교회는 크리스마스를 지키지 않는다. 
그날은 예수님의 탄생일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일반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예수님의 탄생일로 기념하면서 중요하게 지킨다. 
물론 2천 년 전 당시, 이스라엘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교회에서 믿고 있는 예수와 
일반 교회에서 믿고 있는 예수는 다른 예수인 것일까? 
탄생일도 다르고, 알려주신 예배일도 다르니 말이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린도후서 11:4)


서로 다른 예수를 믿고 있다면,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누구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교회에서 믿고 있는 예수와 일반 교회에서 믿고 있는 예수 중에서 누가 맞고, 
누가 틀린지 판단해보자. 물론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당연히 성경이다(요한복음 5:39). 





왜냐하면 모두 성경에서 알려주는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예배일은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릴까?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누가복음 4:16)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사도행전 17:2)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가복음 16:9)


예수님께서 친히 규례로 삼으시고 본보여주신 예배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안식일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도 바울이 규례로 삼고 지켰던 날도 
안식일이다. 그 안식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 전날인 토요일이다. 
즉 성경의 예배일은 토요일로서, 일요일 예배는 틀린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일은 어떨까?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누가복음 2:5~8)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장면이다. 정확한 날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스라엘은 지중해성기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일이라고 알고 있는 12월은 
우기인 겨울에 해당한다.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양을 쳤다는 것은 적어도 추운 겨울은 
아니라는 얘기다. 성경의 증거 외에도 교회사 등을 통해 살펴보아도, 
12월 25일은 예수님의 탄생일이 아니다. 
그날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기념하는 건 성경상 틀리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잘 구분해서 사용해야 서로 오해나 혼동 없이 정확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었을 때, 세상은 더욱 따뜻한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구원과 상관없는 것은 비록 틀리더라도 넉넉하게 웃어넘기는 아량을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성경상 틀린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출처 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29일 월요일

쿼바디스<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쿼바디스


아직 이 영화를 본 것은 아니다, 다만 교계를 뜨겁게 하며 논란이 되고 있어 관심이 
갈 뿐이다. 영화의 줄거리와 리뷰, 뉴스 등을 살펴본 결과 ,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기는 건 사실이다. 


영화 '쿼바디스 (QUO VADIS, 2014)’는 국내 대형 개신교회들의 감추고 싶은 치부들을 
들춰내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S교회 목사의 배임 사건, J 목사의 성추행 의혹, 
수천억 원이 소요되는 교회 건축 문제, 목사 아버지들의 아들 세습 문제 등 
오늘날 교회들이 돈과 권력을 좇아가는 세속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영화는 개봉부터 순탄치 않았다. 한국교회언론회는 기독교 교단에 
공문을 보내 ‘쿼 바디스’ 상영 중단을 압박했다. 
아무래도 그들의 민낯을 드러낸다는 것이 껄끄럽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내용은 그저 그들의 겉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기독교가 ‘개독’이라는 몹쓸 별명을 얻은 이유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겉모습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패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리더들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수세기 전부터 정치와 결탁하고,
심지어 살인, 간음, 근친상간 등 온갖 치졸하고 비열한 패륜을 저질렀다.




그렇다면 과연 기성교단의 부패 원인과 건강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목회자의 정직한 신앙생활? 
세습 청산? 
교회의 대형화 억제?
 이런 것만으로는 개독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기성교단이 흔히 말하는 겉모습의 개혁이 아니라 진정한 개혁을 이루기 위해 
뼛속 깊이 그리스도를 닮고 변화되고자 노력하는 진리의 개혁이 우선돼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수받았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들처럼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사도행전 17:2)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1:2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사도행전 20:6)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사도행전 2:1)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새 언약의 
계명대로 안식일,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등 하나님의 절기를 지켰다.

하지만 현재, 
예수님의 새 언약의 계명은 어디로 갔는가.
 하나님의 절기를 뺀 곳에는
 일요일 예배,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 
낯선 ‘사람의 계명’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이 근본적인 진리의 개혁은 배제하고 겉모습만 
고쳐보겠다고 개혁을 운운하고 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누가복음 11:39)


쿼 바디스? 기독교인들이여, 그대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물으신다.



출처 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28일 일요일

훌륭한 리더, 성공한 팔로어<하나님의교회&안상홍님>

훌륭한 리더, 성공한 팔로어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서, 구성원들을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리더(leader)라고 부릅니다.


리더라는 말은 ‘참다’, ‘고통받다’, ‘견디다’ 등을 뜻하는 독일 고어에 어원을 둔다고 합니다.


그만큼 리더의 역할이 쉽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리더의 지시를 따르며 리더가 조직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조직이 나아가는 방향에 맞추어 주도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사람은
 팔로어(follower)라 칭합니다.


팔로어 역시 독일 고어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는데 ‘돕다’, ‘후원하다’, ‘공헌하다’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결국 리더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고 뒤에서 힘껏 도와주는 사람을 팔로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팔로어들이 많을수록 조직은 활발하게 움직이고 눈에 띄는 성과를 냅니다.


리더의 의도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파악해,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 헌신하는 팔로어들이
 많은 단체는 순풍에 돛을 단 배와 같이 목표를 향해 정확하고 신속하게 나아갑니다.   


멜기세덱 군사로 부르심받은 우리는 하늘 군대를 이끌어가시는(lead) 
하늘 아버지 어머니를 따르며(follow) 복음에 헌신하는 영적 팔로어들입니다.


온 세상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맡겨주신 사명을 은혜롭게 
감당하며 천국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사람들.


우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리더를 만난, 가장 성공한 팔로어들이 아닐까요?




2014년 12월 26일 금요일

보고도 못 믿고, 안보고도 잘 믿고<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보고도 못 믿고, 안보고도 잘 믿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둘 중 어느것에 더 신뢰가 갈까?
 당연히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더 신뢰가 갈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공기나 바람, 전자파 같은 것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도 유형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우리는 그 사실을 통해 존재감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성경이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볼 수 있는 것에 더 신뢰를 두고 살아가는 인생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것이 성경이다.




성경에는 우리의 영혼이 안전하게 천국까지 도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들어 있다.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것이며 성경에서 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지금 이 시대,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른 채 막연한 신앙의 길을 걷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당연시 여기고 있는 일요일예배,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등을 성경에서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성경에서 확인해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는가? 그러나 아무리 보려 해도 결단코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의무의 예를 보자. 이는 물론 신자의 가장 중대한 의무의 하나이지만 성서에서는 그에 대한 명백한 구절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성서의 안식일은 토요일이지 일요일은 아니다.” 
(교부들의 신앙, 가톨릭출판사)


“일요일은 태양, 또는 태양의 신을 기리어 붙여진 명칭이다. 비록 1세기에는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이교적 이름을 사용하기를 회피하였지만 기독교인들은 2세기부터 벌써 이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 그리스도교시대 초기에 로마제국에서, 특히 로마군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수많은 동방종교 가운데 하나가 페르시아로부터 수입된 미드라 종교였다. 미드라는 태양신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미드라 종교는 일요일을 성일로 간주했다.”
 (기독교대백과사전, 기독교문사)


“서기 321년 그(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일요일을 일반적인 공휴일로 선포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과 이교도를 함께 마음에 두었다. … 황제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그리스도께 예배하고 이교도들은 그들의 태양신을 섬기는데, 두 종교의 예배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기독교회는 많은 이방 사상과 상징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태양 숭배로부터 예수의 탄생일이 태양제의 날인 12월 25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교회사핸드북, 생명의말씀사)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지킨 것은 354년의 기록에 나타났으니, 곧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Liberius) 시대였다.” 
(교회사, 이건사)


“추수감사절: 미국에서는 1789년 12월 26일을 추수감사절로 워싱턴(G, Washington) 대통령이 선포하였다.” 
(세계백과대사전, 서문당)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곳에서 행하는 이러한 모든 예배는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교회 역사는 교회가 이교화되면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교황 리베리우스, 미국의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일요일예배나 성탄절, 추수감사절 등이 지켜지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예배들을 고집하는 자들이 보고 있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변질된 교회의 역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배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안식일이다(출애굽기 20:8, 누가복음 4:16, 사도행전 17:2). 그리고 성경 어디에도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지키라는 기록은 없다. 대신 유월절을 영원한 규례로 정해주시고 지키기를 간절히 원하신다고 하셨다
(출애굽기 12:11~14, 누가복음 22:7~15, 고린도전서 11:23~25).


무엇을 보고 믿을 것인가? 성경을 보고도 못 믿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성경에 전혀 기록이 없어 보지 못하면서도 잘 믿는 자가 될 것인가? 일찍이 사도 바울은 성경을 보고도 못 믿고 성경에서 보지 않고도 잘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린도후서 11:4)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구원을 간절히 원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태복음 13:16)



출처 패스티브닷컴
https://www.pasteve.com/?m=bbs&bid=B2BibleCovenant&uid=3086

2014년 12월 25일 목요일

"가족이니까 괜찮다?"<하나님의교회&행복한 가정&안상홍님가르침>

'가족이니까 괜찮다?'

-가족에 대한 착각을 깨뜨리자-



가족은 서로 다른 성별, 서로 다른 나이의 구성원들이 모인 최초의 집단입니다. 서로가 진심으로 대하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어려워지는 관계이기도 하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족에 대한 착각은 , 가족관계는 노력을 안해도 저절로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니까 잘 보일 것도 없고 그저 있는 그대로 편하게 대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가족 사이를 갈라놓는 크고 작은 분쟁들이 결국은 서로를 너무 편하게 대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달에는 무심코 빠지기 쉬운 가족에 대한 여러가지 착각에 대해 알아보고 가족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으면 합니다. 가족은 나의 일생을 함께하며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원만한 관계를 위해 가족 구성원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착각1 - 가족이니까 말 안해도  알겠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CM송입니다. 광고 효과는 톡톡히 보았지만 이 노래의 가사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100% 다 알수는 없으니까요. 가족이니까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알겠지 하는 생각은 정말 큰 착각입니다.
가족의 사랑과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입을 꾹 닫아버리는 가정과 그때그때 “사랑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잘했어요” 등과 같은 말로 마음을 표현하는 가정의 분위기는 사뭇 다를 것입니다. 가족에게 부정적인 표현은 잘하면서 긍정적인 표현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꼭 말을 해야 아나?’라는 생각을 가지면 해야 할 말도 안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으니, 처음엔 쑥스럽더라도 마음에 있는 것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습관을 가져봅시다. 가족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다 알아줄 것이라는 기대가 클수록 그에 부응하지 못할 때 실망도 커집니다.
“아내의 마음도 모르면서 남편이라고 할 수 있어?”
“엄마는 내 맘 다 알 거라 믿었어.”
“너는 그걸 꼭 말로 해야 알겠니?”
이처럼 원망 섞인 말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기대가 컸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가족이라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 분명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갈등이 생겼을 땐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기대치를 융통성 있게 변화시키고 대화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말하지 않고 눈빛만 보아도 통하는 사이가 가족이라지만 많이 표현하고 자주 대화할수록 사랑도, 행복도 커지는 법입니다.





착각 2 - 가족이니까 이해해주겠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가족은 혈연과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반적으로 상대방이 나한테 맞춰주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니까 짜증과 불평도 당연히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얼마 전, 공익광고협의회에서 ‘안과 밖이 다른 가족’이란 제목의 광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래 직원들에게는 자상하지만 아내에게는 무뚝뚝한 남편, 고객에게는 친절하지만 아들에게는 냉랭한 엄마, 친구와 있을 땐 쾌활하지만 아버지와 있을 땐 시무룩한 아들, 회사에서는 상냥하지만 집에서는 무심한 딸. 이렇게 이중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준 뒤 시청자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안과 밖이 다른 사람인가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남들에게 하는 것 반만큼만 집에서 하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친구나 회사 동료들에게는 친절한 반면에 때로 가족에게는 괜히 심술을 부리거나 퉁명하게 대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까운 사이니까 나를 이해해주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이 불러온 잘못된 행동입니다. 만약 가족 중 누군가 그러한 생각으로 나를 힘들게 한다면 그것도 넓은 마음으로 무조건 받아줄 수 있을지 생각해보세요.
가족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이긴 하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안과 밖이 다른 가족에게, 위 광고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밖에서 보여주는 당신의 좋은 모습, 집에서도 보여주세요.”





착각 3 - 가족끼리 못할 말이 어디 있어

“살 좀 빼.”
“이것도 몰라?”
“됐어, 말이 통해야 말을 하지.”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사랑하는 가족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살면서 들은 말 중에 가장 심한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은 서로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또한 아픔을 가장 많이 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이 말을 하면 저 사람이 기분 상하지 않을까?’ 하며 걱정하다가도 가족과 대화할 때는 모든 것이 용납되리라는 생각에 서슴없이 내뱉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한 말을 해놓고도 농담이었다는 한마디로 자신의 무례함을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그렇게 속이 좁아서야”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올 때도 있습니다.
똑같이 서운한 말을 듣더라도 남에게 듣는 것보다 가족에게 들을 때 훨씬 아프고 오랫동안 가슴이 시린 건 왜일까요? 그 누구보다 가족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큼 식구의 기분, 처한 형편, 성격 등을 세세히 살펴서 말해야 합니다. 친구를 용서하는 것보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가까운 사람이 주는 상처는 그만큼 씻어내기 어렵습니다.




집에 가면 가장 먼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듯이 집에서는 누구나 마음의 긴장을 풀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있을 때 ‘가족끼리 무슨 말을 못해’라는 생각으로 여과 없이 감정을 표출하거나 분풀이를 한다면 더욱 치명적인 상처로 남게 될 것입니다. 남들에게 차마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말은 가족에게도 삼가야 합니다.






착각 4 - 가족끼리 예의는 무슨 …

사업상 누군가와 만날 때는 약속 전에 약속 시간을 확인하고,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거나 어길 것 같을 때는 미리 전화를 한다거나 메일을 보내는 등 고객 감동이라는 명목하에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가까운 가족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불가피하게 지키지 못할 경우 ‘어쩔 수 없지 뭐. 뭘 그 정도 가지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는 않는지요.






사실, 가장이 일을 우선시하는 이유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인데 돌아오는 것은 원망뿐이니 억울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기게 될 경우, 가족들에게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미리 양해를 구하고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가정은 가족끼리 사랑과 우애로 서로 도우며 사는 공동생활의 터전이며, 사회생활의 기초적인 생활양식을 몸에 익히고, 인격을 수양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가족 간에 서로 존중하며 기본적인 예절을 지켜 나갈 때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고, 나아가 밝고 명랑한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가족 간에 허물없이 지내는 것이 좋다지만 지나치게 격의 없이 행동하면 불화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키라’는 말이 있고, 영어 속담에도 ‘Familiarity breeds contempt(친해지면 무례하기 쉽다)’ 했으며, 공자도 ‘가족들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라. 이것은 한 사람이 되는 뿌리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람의 본연의 모습은 가정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가족에게 예의를 지키지 못하면서 타인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보여주기 위한 예절일 뿐입니다. 진정 예의 바른 사람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먼저 예의를 다하는 사람입니다.

‘가족이니까’라는 생각을 자기를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끌어들일 것이 아니라 화목하고 행복한 집을 짓는 데 주춧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가족이니까 더 표현하고, 가족이니까 더 친절하게 대하고, 가족이니까 상처 주지 말고, 가족이니까 더욱 예의를 지킨다면 어떠한 강풍이 불어 닥쳐도 끄떡없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참고 : 『한국형 대화의 기술』(이정숙 著), 『젊은 그녀 전쟁터를 즐겨라』(차영 著)



-행복한 가정 가족애 소통 중에서-

시작<하나님의교회&좋은글&엘로히스트>

시작







1970년대 후반까지 에베레스트 산을 산소마스크 없이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라인홀트 메스너와 피터 하벨러는 산소가 부족한 

고산 지역에 적응하는 훈련을 반복한 끝에 1978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8천미터가 넘는 에베레스트 

최고봉을 산소 도구 없이 오늘 산악인은 전 세계에서 

150명이 넘는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그때는 왜 불가능했을까.







-엘로히스트 쉼터중-

2014년 12월 24일 수요일

서리 같은 교리<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서리 같은 교리




이슬이 얼어서 생긴 얼음 결정체를 서리(霜, Frost)라고 한다. 서리는 주로 밤이나 새벽에 복사냉각에 의해 생긴 이슬이 어는점 이하가 될 경우 생긴다. 서리가 발생하는 조건은 낮 최고 기온이 18도 아래오 내려갈 무렵이다. 저녁 6시 기온이 7도 정도, 밤 9시 기온이 4도 아래로 떨어지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서리가 무서운 것은 지면의 식물에 부착돼 세포 조직을 동결시킨다는 점이다. 때문에 농작물에 서리가 내릴 경우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초봄, 녹차밭에 서리가 내리면 최고의 차라 불리는 우전차 수확은 포기해야 한다. 또한 배꽃이 서리를 맞으면 그해 배 농사는 끝이다.


식물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서리처럼 우리 영혼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는 서리같은 교리들이  있다. 아무리 애지중지 키운 꽃이라도 서리가 내리면 마치 뜨거운 물을 부어 놓은 듯 시들어버린다.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신앙생활을 영위해나가야 함에도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고 가르친다면 그 영혼은 서리를 맞은 것과 같다. 서리와 같은 교리란 성경에 없는 사람의 계명을 말한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5:8~9)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헛된 경배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그렇다면 제대로 알자. 서리와 같은 사람의 계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성경에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애굽기 20:8)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7, 26~28)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린도전서 11:23~24)



안식일과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계명이다. 이와 반대로 기성교단이 지키고 있는 일요일 예배와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성경에 없는 사람의 계명이다. 해서 이런 사람의 계명을 지키게 되면 마치 서리를 맞은 것처럼 그 영혼은 결국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만다.



농사에도 서리를 예방하기 위해 불을 이용한 연소법이나 바람을 이용하는 송풍법 등 다양한 방법을 강구한다. 우리도 영혼 구원을 위해 서리 같은 교리를 잘 판단해 미리 예방하므로 피해를 입는 일이 없어야겠다. 농사꾼이 서리 피해를 입으면 1년 농사를 망치게 되지만 서리 같은 교리로 인한 피해는 영원하다.라고 한다. 서리는 주로 밤이나 새벽에 복사냉각에 의해 생긴 이슬이 어는점 이하가 될 경우 생긴다. 서리가 발생하는 조건은 낮 최고 기온이 18도 아래로 내려갈 무렵이다. 저녁 6시 기온이 7도 정도, 밤 9시 기온이 4도 아래로 떨어지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출처 패스티브닷컴
http://cafe.naver.com/heavenindependenc/12050

2014년 12월 23일 화요일

6도의 사소한 변화<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6도의 사소한 변화



지구 온난화, 기후변화의 심각성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100년간 우리나라 연평균 기온은 1.7도 상승하였으며 연강수량은 19% 증가하였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지 않는다면
2100년에는 최대 6.4도까지 상승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고작 6도 올라가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6도의 변화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지구 평균기온이 1도만 올라가도 지구에는 이상 징후가 생긴다.
한쪽에서는 가뭄으로 동식물들이 말라 죽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엄청난 폭우가 내리는 기현상이 나타난다.
수자원의 양극화 현상으로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물로 고통받게 될 것이다.
비옥해 보이던 대지는 건조해져 모래가 날리기 시작하며 산불이 일어나 숲이 없어진다.
이쯤 되면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온 세상은 흙먼지와 모래폭풍에 휩싸이게 된다.
자연, 농사는 어려워지고 식료품 가격이 폭등해 식량부족으로 힘겨워질 것이다.
고작 1도의 상승으로 벌어지는 일들이다.



평균기온이 2도 상승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해수면의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바닷물이 산성화되어 플랑크톤이 바닷물에 녹아죽고,
플랑크톤을 먹이로 하는 수많은 어종들도 덩달아 죽는다.
결국 바다 생태계는 파괴되고 인류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3도 상승하면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붕괴된다.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존의 식물들이 말라 죽으면 온난화의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진다.
알프스 정상의 만년설이 사라지고, 엘니뇨 현상에 의한 극단적인 기후가 일상이 된다.



4도 상승하면 북극은 물론 남극의 빙하들까지 녹하 해수면이 높아진다.
이에 따라 전 세계 곳곳의 바닷물이 불거나 수억 명의 피난민이 발생한다.
침수를 면한 지역은 피난민들로 붐비게 될 것이다.



6도가 상승한 지구는 더 이상 푸른 행성이 아니다.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모두 사라지고 정글도 불타 없어진다.
해수면의 상승으로 마침내는 대륙 깊숙한 곳까지 물에 잠기거나
사막화되어 생명체가 디딜 곳이 점차 줄어들게 된다.
자연재해는 일상적인 사건이 되고 도시들은 물에 잠기거나 폐허로 변한다.
한마디로 6도의 상승은 ‘지구 최후의 날’이나 마찬가지다.
사소할 것 같은 6도의 변화는 이처럼 삶의 모든 것을 휩쓰는 위력적인 것이다.



현재, 이상기후로 인해 북반구에서는 영하 50도까지 내려가
세계 최대의 나이아가라 폭포가 결빙되고,
남반구에서는 영상 40도를 웃도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북극과 남극의 빙하는 서서히 녹아 내리고 있으며,
해수면이 높아져 국토를 잃은 나라도 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변화들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재앙의 이유 역시 중요한 것을 사소하게 여긴 데서 비롯된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예레미야 6장 19절


하나님(하나님의교회 안상홍님)의 말씀은 곧 삶이다.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이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하나님의교회 안상홍님)의 말씀,
하나님(하나님의교회 안상홍님)의 법을 소홀하게 여기고 있다.
 반면, 하나님(하나님의교회 안상홍님)의 법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어떨까?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12장11~13절


이르시되 내(예수)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누가복음 22장15절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시편 91편 7절


6도는 사소한 변화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월절이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님의교회 유월절은 결코 사소하지가 않다.

하나님의교회 유월절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는 문제로,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의 엄청난 결과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교회 유월절은 당신을 재앙으로부터 구원하고
당신의 생명을 책임지는, 위력적인 것이다.




출처 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22일 월요일

나비의 고향<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나비의 고향



세상의 모든 나무가 낙엽을 떨구고 나목이 된 겨울,
멕시코 시에라마드레 산맥의 숲에 사는 나무에는 여름철보다 더 화려한
오렌지빛 잎사귀들이 무수히 많이 달려 있다.
잎사귀의 무게 때문에 어떤 나무가지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어져 있다.
실은, 나뭇잎이 아니라 헤아릴수 없이 많은 나비떼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겨울잠을 자고 있는것이다.


그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는 주인공은 왕나비의 일종인 모나크 나비(Mornach Butterfly)다.
 멕시코의 시에라마드레산맥 외에도 미국 캘리포니아연안에서는 겨울이면 이렇게 전나무나 
유클립스나무 등에 매달려 겨울을 나는 모나크나비들을 볼 수 있다.


출처 :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


긴 겨울잠을 자고 난 모나크나비들은 짝짓기를 한 후 미지의 나라를 향해 대장정을 시작한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은 캐나다 혹은 알래스카다. 
0.5g의 연약한 몸으로 수천km에 달하는 멀고도 험한 여정을 떠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해마다 봄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 북쪽나라를 향해 날갯짓을 한다.



그 여리디여린 날개를 가지고 모나크나비는 시속 50km의 속도로 날아야 한다. 
그 고된 여행은 3~4주간 계속된다. 
남쪽나라에서부터 알을 품고 온 어미 나비는 아기의 안식처를 찾는다. 
그들이 찾는 안식처는 독성이 강한 풀, ‘밀크위드’다. 
다른 동물들이 밀크위드를 먹을 경우 중독을 일으켜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모나크나비의 아기들은 밀크위드의 독에 중독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잎사귀를 먹고 자라 몸에 독성을 갖게 됨으로 자기 몸을 지킨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생존전략이다.



아기가 자라 애벌레에서 완전한 나비로 탈바꿈한 모나크나비 2세들은 3~4시간 동안 날개를 말린 후,
 다시 북쪽나라를 향해 날갯짓을 한다. 모나크나비 1세가 겨울잠에서 깨어 남쪽나라를 출발한 지 
약 5개월 만에 북쪽나라에 도착한다. 1세들은 이미 모두 죽고 없다.


모나크나비들은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면 겨울나기를 위해 다시 남쪽나라를 향해 날아간다. 
멀고도 험한 대이주를 하는 동안 2세와 3세들이 수명을 다한다.
 1세들이 겨울을 났던 남쪽나라의 숲으로 돌아온 주인공들은 건강하고 용감한 4세들이다.


경이로운 일은 모나크나비 4세들이 1세들, 
즉 자신들의 증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겨울을 났던 그 숲, 

그 나무에 정확하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곤충학자들 사이에서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사람들은 모나크나비를 ‘세계 최고의 항법사’라고 부른다.
 모나크나비의 항법에 대한 메커니즘은 아직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다.
 그저 태양, 달, 자기장을 이용하는 것이라고만 추측할 뿐이다. 그 연약한 생명체들이 어떤 신호작용에
 의해 해마다 수천km에 달하는 길을 오갈 수 있는 것인지 사람들은 해독하지 못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요한계시록 4:11)


하나님께서 모나크나비들의 회귀 메커니즘을 설계하실 때, 우리들이 잃어버린 고향, 
천국을 다시 찾아가기를 바라신 건 아닐까.





출처 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21일 일요일

어머니의 손길

어머니의 손길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새끼 원숭이를 만져주지 않았더니 시름시름 앓다 
요절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반면, 생후 10주에서 6개월 사이의 아기들을 관찰한 결과로는 엄마가 평소 자주 보듬고 
어루만져준 아이가 그렇지 못한 아이에 비해 감기에 잘 걸리지 않고 잔병치레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어른이라고 다르 것은 없었습니다. 신경질적이거나 우울증을 앓고 있는 성인이, 
안아주는 횟수와 지속 시간에 따라 병의 회복 속도로 빨라졌습니다. 
우울증 치려에 애완동물을 쓰다듬어주는 치료요법이 등장한 것은 이러한 
실험 결과에서 기인합니다.


열방에 흩어져 있던 자녀들이 하늘 예루살렘 어머니의 품으로 나아옵니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죽어가던 영혼들이 따듯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어머니께서 어루만져주시는 손길로 나음을 입고 소성함을 입습니다.
영혼에 생기가 돌고, 활력이 넘칩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 안식처, 
어머니의 품, 어머니의 손길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만병통치약입니다.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보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보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잠 6: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군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현대어 성경 

 얘야, 다른 사람의 빚 때문에 네 재산을 담보로 잡혀 준 일이 있느냐? 또는 다른 사람이 무슨 사업을 한다고 하여 그 사람의 보증을 서 준 일이 있느냐? 그렇다면 큰일이구나. 네가 재산을 담보로 잡혀 주고 네가 보증을 서 준게 잘못이다. 담보와 보증이라고 하는 것은 올가미와 같은 것이다.
얘애, 이제 네 재산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어서 그 사람을 찾아가  '제발 담보를 잡은 것과 보증 선 것을 무효로 해 달라'고 애원을 할 수 밖에 더 있겠느냐? 재산은 건지고 봐야 하지 않겠니? 어서 그 사람을 찾아가거라. 이런 상황에 잠잘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눈붙일 생각도 하지 말아라. 노루가 뒤좇아오는 사냥꾼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재빠르게 내달리듯,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가 사냥꾼이 쳐 놓은 창애에서 날쌔게 빠져 나가듯, 어서 서둘러 벗어나거라








--------------------------- -----------------------------------       




[잠 11: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현대어 성경 :
 빚 보증을 서는 사람은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으나, 보증을 서지 않으면 아무런 염려가 없다.




--------------------------- -----------------------------------       



[잠17:18]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현대어 성경 : 
앞뒤를 가릴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은 남의 보증을 손쉽게 잘도 서준다.




--------------------------- -----------------------------------       




[잠22:26]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현대어 성경 : 
남 대신 담보물을 잡혀 주거나 빚 보증을 서지 말아라. 네가 그것을 갚아 줄 수 없을 때는 네가 누운 자리마저도 빼앗아가리라. 어찌 그런 일을 당하려느냐?



--------------------------- -----------------------------------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히 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 -----------------------------------       



-> 하나님 가르침대로만 살면 가정도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의교회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교회입니다.
가정을 중시하는 하나님의교회는 구원의 참 진리가 있습니다.







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세례와 침례<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세례와 침례


세례나 침례는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 신성한 예식이다.
신앙의 최종 목적인 구원으로 향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예식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세례는 죄를 물속에 씻는다는 의미고, 침례는 죄를 물속에 장례 지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비기독교인들이야 두 예식의 차이를 별반 느끼지 못하겠지만 실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예식들의 차이점을 교리비교를 통해 살펴보자.





   세례

1.근거


세례(洗禮)의 한자는 씻을 세(洗), 예식 례(禮)다. 성경에서는 죄를 적은 양의 물로 씻어서 사했다는

세례식의 기록은 없다. 단지 역사적으로 살펴본다면 세례 의식은 초기 기독교가 예루살렘을 시작해
소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지로 전파되면서 생겨났다. 당시 무역이나 여행에서는 불가피하게
사막을 지나야 했고 물이 귀한 사막에서 복음을 들은 후 새 삶을 찾고자 예식을 행해야 하는 경우,
많은 양의 물을 사용할 수 없어 물을 조금 뿌려 약식으로 행하는 세례식을 베풀었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행해졌던 이 예식은 A.D. 120년경 많은 교회로 전파됐다.

2. 교단


세례식은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등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
에서 행해지고 있다.

3. 결론


세례식은 성경에 기인하고 있지 않다. 예식 자체가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의미 정도만 성경에 두고 행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있는 셈인 것이다.
세례식으로 죄 사함을 받고자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방법으로 죄 사함을 구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죄 사함, 즉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국내 한 포털사이트에는 세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성서의 세례는 물에 몸을 담그는 방식이었다. 즉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하던 대로 강이나 
호수의 물속에 완전히 몸을 담가야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침례


1. 근거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으로 죄가 없으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침례를 행하게 하셨다.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
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3~17)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받은 침례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침례(浸禮)의 한자는 잠길 침(浸), 예식 례(禮)다. 예수님께서는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다. 몸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는 의미다. 간단하게 세례식을 행했다면 굳이 물에 내려가서 온몸을 적시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요단강 속으로 함께 내려가 침례식을 행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직접적인 행위를 통해 죄 사함의 의식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여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5)


2. 교단


오늘날 침례를 행하는 교단에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가 있으며 그 외에도 침례교와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몰몬교), 여호와의증인 등이 있다.


3. 결론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구원의 표인 ‘침례’를 거론하고 있다. 침례는 온몸을 물에 적시거나 담그는 예식으로 반드시 ‘침수’가 원칙이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현 재무부 장관급인 내시에게 베풀었던 예식도 세례가 아닌 침례였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 
(사도행전 8:35~39)


이 두 사람의 행위 속에서 침례라는 예식의 시급함을 짐작할 수 있지만, 고관대작으로서 조금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하고 깨끗한 물 한 병으로 얼마든지 예식이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세례가 올바른 예식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침수’를 원칙으로 하는 침례식은 물 한 병으로 해결하기 힘들다. 비록 하천에 흐르는 물이라도 온몸을 적셔야 하는 침례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깨끗한 옷 정도는 버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내시의 결단을 보면서 천국을 향한 그의 믿음과 당시 행해졌던 죄 사함의 의식이 바로 침례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침례는 깨닫는 즉시 행해야 한다. 6개월이나 1년간의 학습 후 침례를 행하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침례를 즉시 행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인생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언 27: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9~20)
 

사람은 하루 동안에도, 한 시간 후 또는 일 분 후에도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침례를 베푼 후에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



출처 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18일 목요일

자기 불구화<하나님의교회&행복한가정>

자기 불구화(Self-Handicapping)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하려니 머리에 들어오는 건 없고 공부하기도 싫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쉬운 선택은 그냥 자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험 전날 일찍 
잠들어 성적이 나쁜거라고 변명할 수 있으니까요.


수험생 뿐 아니라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기량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할 때
'연습을 많이 못 했다','컨디션이 안좋다'등의 말로 안 좋은 결과를 얻을 것에 
대비하여 미리 실패의 이유를 만들어 놓곤 합니다.
이러한 심리를 '자기 불구화'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고, 자존심을 보호받기 원하며,실패를 싫어합니다.
자기 불구화에 빠지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임을 다른 것에 자꾸 전가하게 되면 갖가지 핑계 속에 안주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할 이유가 있으니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되고,
자연히 좋은 결과와도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 불구화에 빠지지 않으려면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현명한 방법입니다.



-행복한 가정 12월호-



2014년 12월 17일 수요일

여자의 뼈<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여자의 뼈


스승과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고자 길을 떠났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 무엇일까 논하며 길을 가다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그 마을은 갑작스러운 변고가 닥쳤는지 사람의 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많은 인골이 얽히고 설킨 모습을 바라보던 스승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 가운데에서 여자의 뼈를 찾을 수 있겠느냐?"
제자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여자의 뼈를 가릴 수 없었다.


잠시 후 스승은 어떤 뼈 하나를 집어들고는 말했다.
"이것이 여자의 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것이 여자의 뼈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하고 반문했다.
스승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여자의 삶을 한번 생각해보아라. 
여자는, 어려서는 여자이기 때문에 늘 남자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결혼을 해서 아기를 갖게 되면 자신의 몸에 있는 모든 양분을 아기에게 나눠준다. 
아기를 낳을 때에도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아기를 낳아 젖을 물릴 때 자기 몸속에 있는 
모든 영양분을 아기에게 먹여야 한다. 이렇게 하다 보니 여자의 살은 물론이고 뼈 속에 양분이 
남아 있을 리가 있겠느냐? 여자의 이와 같은 쓰디쓴 삶이 여자의 뼈를 가볍고 검게 만들었느니라.”


스승의 말을 듣고 난 제자들은 모두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인생이 과연 그렇구나. 모든 것을 다 주기만 하셨지 당신을 위해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구나.’ 하는 깨달음에 숙연해졌고 이내 눈물을 흘렸다.


자녀를 잉태하고 낳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자녀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자신의 뼈 속에 있는 골수까지도 다 뽑아서 주는 존재가 여자, 
즉 어머니이기에 그 뼈가 가벼울 수밖에 없다는 스승의 말에 제자들은 모두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무조건 베풀어주는 존재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녀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어머니. 
왜 이 땅의 모든 어머니의 삶은 이럴 수밖에 없을까? 
바로 하늘 어머니의 삶이 그러하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이사야 66:10~13)


사도 바울은 “위(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증거했다
(갈라디아서 4:26). 즉,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예루살렘’은 ‘하늘 어머니’를 뜻한다. 
하늘 어머니께서는 죄인된 자녀들을 늘 사랑으로 양육하시며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신다. 
삶의 모든 중심이 자녀들이기에 정작 하늘 어머니의 삶은 곤고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받는 예루살렘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이사야 52:14)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이사야 54:11)


하나님의교회에는 죄인된 자녀들을 찾아 하늘에서 이 땅까지 내려오신 어머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가녀린 여인의 모습이지만, 늘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도 안위를 받지 못한 모습이지만 
그 모든 고통을 감추신 채 따스한 미소로 자녀들을 안아주시는 하늘 어머니가 계신다.

 그분은 사랑의 근원이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모본이시다.



출처 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누구나 알고 있는 주기도문이지만<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누구나 알고 있는 주기도문이지만


기독교 특유의 사상과 교리적 색채가 물씬 느껴지는 주기도문
주기도문은 전 세계 초교파적으로 암송되고 있는 기도문이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도시대부터 지금까지 2천년 동안이나 매 예배때마다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천국 소망을 각인시키면서 읊어지고 있다.


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마태복음 6:9~13)


그런 가운데 오랜 세월 숨겨지고 감춰져 왔던 주기도문 속의 극비사항이 예언의 때를 따라
이 사람 저사람의 입소문을 통해 전 세계 곳곳으로 널리 퍼지고 있다.
종교계 기득권층의 거부와 박해에도 좌절하지 않고 온갖 편견과 모함을 극복하고 
고정관념의벽을 뛰어 넘어, 예수님의 새이름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 성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요한계시록 3:12)



…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10)


오직 위(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어머니 하나님의 실체는 존재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과 신선한 충격일 뿐 아니라 오랜 전통과 
상식을 뒤집는, 인류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화젯거리일 수밖에 없다. 
화석처럼 굳어진 편견과 낡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의식을 깊은 잠에서 강렬하게 
깨워주는 자명종이라고도 할 수 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녀들과의 관계를 가족의 핵심인
 ‘아버지’라는 단어를 먼저 지정하여 특별호칭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한 분인 것을 의미한 것일 뿐, 
예언적 시기상 아직 거론할 수 없는, 또 다른 한 분의 존재를 포함해서 표현된 것이 아니다.


사전에서는 ‘아버지’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자기를 낳아 준 남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혹은, 
“자녀를 둔 남자를 자식에 대한 관계로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기를 낳아 준 남자, 자녀를 둔 남자가 바로 아버지인 것이다.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인들 중 얼마나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에서 남성 형상의 이미지를 의식하거나 떠올려 보았을까?


실제 필자는 실험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 
“아버지 하나님을 머릿속에 그릴 때 어떤 형상이 떠오르는가? 남성 형상의 모습을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라고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그냥 호칭상 아버지일 뿐이지,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남성이니 여성이니 따지는가?” 하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아버지라는 단어의 근본 의미조차 상실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남성 형상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 결코 여성 형상의 어머니 하나님을 수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그냥 하나님의 별칭이나 대명사 정도로 
아버지라고 부르면 되는 것이지 남성, 여성을 왜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하나님과 자녀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아버지’라는 호칭의 의미는 
함부로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다른 존재로 대체할 수도 없고 타인이 대신할 수도 없다.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의 자녀들을 두신 ‘남성’ 형상의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성’ 형상의 하나님이신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영원불변의 진리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모르거나 무관심한 것은 마치 
자신의 근원도, 고향도, 부모도, 형제도 무시하고 부정하는 반항아와 다를 바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판으로 손꼽는 솔로몬 왕의 명재판을 생각해보라. 그의 생애 동안 수없이
 많은 재판을 진행했을 터인데, 성경에 유일하게 기록된 재판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모성본능을 통해 진실과 거짓을 파헤친 이 사건은 온 인류에게 어머니의 존재와 역할을 
묵시적으로 깨우쳐주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를 가진 자만이 주기도문 속 비밀인 하늘 어머니의 존재를 깨달으리라.



출처 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15일 월요일

*위가 두 개인 개미*

위가 두개인 개미


하루는 신문에서  '지구상에 살고 있는 개미들의 총 무게는 얼마나 될까?'
하는 제목으로 개미의 생태계가 실린 흥미로운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해답은 놀랍게도 지구상에 살고 있는 전인류의 총 무게와 같다고 합니다. 


가히 상상치 못했던 수치의 기사를 읽으며 저는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체 어떠한 특성과 요소가 있기에 
그와 같이 무리를 이루는 번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는 사람을 통하여 인터넷으로 개미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개미가 엄청난 무게의 수치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은 독일의 생태학자들이 실험 연구한
 사실을 토대로 한 것인데 브라질 열대 밀림 속에서 사는 모든 동물들을 
거대한 저울에 올려 무게를 달아본다는 가정하에 연구해 본 결과 
흰개미를 포함한 전체 개미가 밀림 전체 동물의 중량 중 약3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는 개미의 부지런한 근면성이 있는 것도 요인이지만 가장
 큰 요인은 개미는 작지만 사회성이 발달한데다 수가 워낙 많기 때문이기도 하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의 관심을 끈 개미의 기사는 
개미에게는 위(胃) 가 두 개나 있다는 점입니다.

 각 생물마다 소화 기관과 먹이를 저 는 방식은 다르지만 
개미의 경우 심장과 모이 주머니, 전위, 중장과 직장,그리고 항문과 기타 기문,
말피기씨관,두푸르샘,독샘, 저장낭이 있는데 
그 외에도 먹이를 임시 저장하기 위한 가짜위가 있다나요?


그 가짜 위를 영어로 크라프(Crop : 거둬들인 수확을 의미함) 또는 크러프라고 하는데 
이 두 개의 위(胃) 중에서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평소에 모아온 꿀과 양식을 저장하였다가 배고픈 동료들에게 
입을 통하여 양식을 나눠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배가 고픈 개미가 동료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게 되면 위에 저장해 농은 양식을 
되새김질하듯 내어 먹여주는 이 생존을 위한 생태계의 신비는 
실로 저의 마음에 크나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생활을 할 때나 혼자만 가는 천국이 아니기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서로 사랑하고 위하며 나눠줄 줄 아는 그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생명의 양식을 자신을 위해서만 쌓지 말고 시온의 가족 된 내 형제자매를 위해서도 
저장하고 준비해야 함을 말입니다. 
나 자신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잘 깨닫고 이해하여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하늘나라 갈 수 있도록 손잡아 주는 것!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닐까요?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우리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내 양을 먹이라’ 는 음성을 기억하며
 영의 양식이 결핍되어 시들하게 죽어 가는 영혼들이 없는지 살펴봅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한마음이 되어 진정한 사랑의 꽃을 피우는 
시온의 향기들이 다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구 소식지 '십사만사천지 23호]



이교주의의 혼합물=크리스마스(성탄절)

이교주의의 혼합물=크리스마스(성탄절)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의 합성어다. 
흔히 그리스도의 뜻을 기리기 위한 의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이때 행해지는 의식은 예수님의 
생애나 가르침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교도에서 유입된 잡다한 의식의 혼합물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그의 저서에서 
“전 로마와 그리스에서 12월 25일을 공휴일로서 
축하하는 최대의 이교 예배는 이교 태양신 예배인 미트라 종교였다. 

이 동계 축제를 탄생 즉, 태양의 탄생이라고 불렀다”고 밝혔다.


결국 태양신의 탄생일이 기독교 내로 유입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둔갑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크리스마스 때 카톨릭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의식들이 태양신교의 의식과 닮아
 있을 수 밖에 없다. 태양신교의 의식 중 12월이 되면 3대 축제가 열렸는데, 
기독교가 그 풍습 또한 그대로 들여왔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주고 받는 풍습은, 3대 축제 중 하나인 시길라리아(Sigillalia) 제일에 
어린아이에게 인형과 같은 선물을 나눠주는 풍습을 계승한 것이다. 
며칠 동안 환락을 즐기는 것도 사투르날리아(Saturnalia) 제일의 모습 그대로다.





태양신교의 사상은 크리스마스 트리와도 연관이 있다.
고대 바벨론 전설에 따르면 한 상록수가 죽은 나무 그루터기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새로 솟아난 상록수가 죽은 태양신 니므롯이 그의 아들 담무스 안에서
회생한 것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이 외에도 이집트, 로마 등 여러 국가에서 사철 푸른 나무,
일명 거룩한 나무에 대한 샤머니즘적인 숭배사상이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새해가 되면 악마를 물리치기 위하여 집과 주변을 상록수로 꾸며왔던
 주술적인 신앙의 형대가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종려나무를 신성시했으며,
로마에서는 전나무를 거룩하게 구별하고 농신제 기간 동안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열매를
장식하며 태양신을 숭배하는 신앙적 행위로 기념해 왔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이러한 나무에 대한 사상를 재현한 것이다.



'Festivals, holy days and saints’ days'는 “
크리스마스 나무의 도금한 견과나 볼들은 태양을 상징하며 … 
동지절의 모든 축제는 크리스마스에 흡수되었고 … 
크리스마스 나무는 오딘(Odin, 스칸디나비아의 신)의 
거룩한 전나무에 바친 영예에서 온 것”이라고 기록했다.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산타클로스 역시,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다

270년경 소아시아 지방(지금의 터키)의 항구도시 파타라에서 
태어난 성 니콜라스(St. Nicholas)가 산타클로스의 효시다. 
니콜라스는 남몰래 많은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결혼을 하지 못하는 세 자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금 주머니를 굴뚝으로 떨어뜨렸고 금덩이는 벽에 걸어둔 양말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도움으로 세 자매는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이야기는 유럽으로 전해졌다.
12세기 초 프랑스의 수녀들이 니콜라스의 축일(12월 6일)의 하루 전날인 5일에
 성 니콜라스의 선행을 기념했고 이후 전 지역으로 이러한 풍습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당시 이들이 기념했던 니콜라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산타클로스의 모습과는 다르다. 
현재의 산타클로스는 영리 목적으로 조작된 것이며, 물론 그리스도와는 관계가 없다.
 “오늘날처럼 산타클로스가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다니는 모습으로 일반 사람들 앞에 등장한 것은
 1822년 성탄절 이브로, 뉴욕의 신학자 클레멘트 무어가 쓴 ‘성 니콜라스의 방문’이라는 
시가 효시였으며, 본래 날렵하고 키가 큰 모습에서 통통한 볼에 뚱뚱한 모습을 하게 된 것은 
토마스 나스트라는 19세기의 만화가가 20년 동안 잡지에 성탄절 삽화를 그리면서 완성한 것이다. 
또 현재처럼 빨간 옷을 입게 된 것은 1931년 미국 해돈 선드블롬이
 코카콜라 광고를 위해 그린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다(시사용어사전 2003).”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약 300년 후,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생일로 제정되면서 
이 같은 태양신 숭배 및 이교도의 풍습이 기독교화된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태양신 축제에 참여하고자 했더 부패한 기독교인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이해해볼 수 있다. 

크리스마스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풍습과 의식이 그리스도가 아닌
 태양신과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출처 패스티브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