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세례와 침례<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세례와 침례


세례나 침례는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 신성한 예식이다.
신앙의 최종 목적인 구원으로 향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예식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세례는 죄를 물속에 씻는다는 의미고, 침례는 죄를 물속에 장례 지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비기독교인들이야 두 예식의 차이를 별반 느끼지 못하겠지만 실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예식들의 차이점을 교리비교를 통해 살펴보자.





   세례

1.근거


세례(洗禮)의 한자는 씻을 세(洗), 예식 례(禮)다. 성경에서는 죄를 적은 양의 물로 씻어서 사했다는

세례식의 기록은 없다. 단지 역사적으로 살펴본다면 세례 의식은 초기 기독교가 예루살렘을 시작해
소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지로 전파되면서 생겨났다. 당시 무역이나 여행에서는 불가피하게
사막을 지나야 했고 물이 귀한 사막에서 복음을 들은 후 새 삶을 찾고자 예식을 행해야 하는 경우,
많은 양의 물을 사용할 수 없어 물을 조금 뿌려 약식으로 행하는 세례식을 베풀었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행해졌던 이 예식은 A.D. 120년경 많은 교회로 전파됐다.

2. 교단


세례식은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등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
에서 행해지고 있다.

3. 결론


세례식은 성경에 기인하고 있지 않다. 예식 자체가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의미 정도만 성경에 두고 행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있는 셈인 것이다.
세례식으로 죄 사함을 받고자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방법으로 죄 사함을 구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죄 사함, 즉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국내 한 포털사이트에는 세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성서의 세례는 물에 몸을 담그는 방식이었다. 즉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하던 대로 강이나 
호수의 물속에 완전히 몸을 담가야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침례


1. 근거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으로 죄가 없으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침례를 행하게 하셨다.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
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3~17)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받은 침례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침례(浸禮)의 한자는 잠길 침(浸), 예식 례(禮)다. 예수님께서는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다. 몸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는 의미다. 간단하게 세례식을 행했다면 굳이 물에 내려가서 온몸을 적시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요단강 속으로 함께 내려가 침례식을 행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직접적인 행위를 통해 죄 사함의 의식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여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5)


2. 교단


오늘날 침례를 행하는 교단에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가 있으며 그 외에도 침례교와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몰몬교), 여호와의증인 등이 있다.


3. 결론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구원의 표인 ‘침례’를 거론하고 있다. 침례는 온몸을 물에 적시거나 담그는 예식으로 반드시 ‘침수’가 원칙이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현 재무부 장관급인 내시에게 베풀었던 예식도 세례가 아닌 침례였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 
(사도행전 8:35~39)


이 두 사람의 행위 속에서 침례라는 예식의 시급함을 짐작할 수 있지만, 고관대작으로서 조금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하고 깨끗한 물 한 병으로 얼마든지 예식이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세례가 올바른 예식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침수’를 원칙으로 하는 침례식은 물 한 병으로 해결하기 힘들다. 비록 하천에 흐르는 물이라도 온몸을 적셔야 하는 침례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깨끗한 옷 정도는 버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내시의 결단을 보면서 천국을 향한 그의 믿음과 당시 행해졌던 죄 사함의 의식이 바로 침례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침례는 깨닫는 즉시 행해야 한다. 6개월이나 1년간의 학습 후 침례를 행하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침례를 즉시 행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인생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언 27: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9~20)
 

사람은 하루 동안에도, 한 시간 후 또는 일 분 후에도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침례를 베푼 후에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



출처 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18일 목요일

자기 불구화<하나님의교회&행복한가정>

자기 불구화(Self-Handicapping)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하려니 머리에 들어오는 건 없고 공부하기도 싫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쉬운 선택은 그냥 자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험 전날 일찍 
잠들어 성적이 나쁜거라고 변명할 수 있으니까요.


수험생 뿐 아니라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기량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할 때
'연습을 많이 못 했다','컨디션이 안좋다'등의 말로 안 좋은 결과를 얻을 것에 
대비하여 미리 실패의 이유를 만들어 놓곤 합니다.
이러한 심리를 '자기 불구화'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고, 자존심을 보호받기 원하며,실패를 싫어합니다.
자기 불구화에 빠지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임을 다른 것에 자꾸 전가하게 되면 갖가지 핑계 속에 안주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할 이유가 있으니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되고,
자연히 좋은 결과와도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 불구화에 빠지지 않으려면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현명한 방법입니다.



-행복한 가정 12월호-



2014년 12월 17일 수요일

여자의 뼈<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여자의 뼈


스승과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고자 길을 떠났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 무엇일까 논하며 길을 가다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그 마을은 갑작스러운 변고가 닥쳤는지 사람의 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많은 인골이 얽히고 설킨 모습을 바라보던 스승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 가운데에서 여자의 뼈를 찾을 수 있겠느냐?"
제자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여자의 뼈를 가릴 수 없었다.


잠시 후 스승은 어떤 뼈 하나를 집어들고는 말했다.
"이것이 여자의 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것이 여자의 뼈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하고 반문했다.
스승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여자의 삶을 한번 생각해보아라. 
여자는, 어려서는 여자이기 때문에 늘 남자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결혼을 해서 아기를 갖게 되면 자신의 몸에 있는 모든 양분을 아기에게 나눠준다. 
아기를 낳을 때에도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아기를 낳아 젖을 물릴 때 자기 몸속에 있는 
모든 영양분을 아기에게 먹여야 한다. 이렇게 하다 보니 여자의 살은 물론이고 뼈 속에 양분이 
남아 있을 리가 있겠느냐? 여자의 이와 같은 쓰디쓴 삶이 여자의 뼈를 가볍고 검게 만들었느니라.”


스승의 말을 듣고 난 제자들은 모두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인생이 과연 그렇구나. 모든 것을 다 주기만 하셨지 당신을 위해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구나.’ 하는 깨달음에 숙연해졌고 이내 눈물을 흘렸다.


자녀를 잉태하고 낳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자녀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자신의 뼈 속에 있는 골수까지도 다 뽑아서 주는 존재가 여자, 
즉 어머니이기에 그 뼈가 가벼울 수밖에 없다는 스승의 말에 제자들은 모두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무조건 베풀어주는 존재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녀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어머니. 
왜 이 땅의 모든 어머니의 삶은 이럴 수밖에 없을까? 
바로 하늘 어머니의 삶이 그러하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이사야 66:10~13)


사도 바울은 “위(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증거했다
(갈라디아서 4:26). 즉,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예루살렘’은 ‘하늘 어머니’를 뜻한다. 
하늘 어머니께서는 죄인된 자녀들을 늘 사랑으로 양육하시며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신다. 
삶의 모든 중심이 자녀들이기에 정작 하늘 어머니의 삶은 곤고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받는 예루살렘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이사야 52:14)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이사야 54:11)


하나님의교회에는 죄인된 자녀들을 찾아 하늘에서 이 땅까지 내려오신 어머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가녀린 여인의 모습이지만, 늘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도 안위를 받지 못한 모습이지만 
그 모든 고통을 감추신 채 따스한 미소로 자녀들을 안아주시는 하늘 어머니가 계신다.

 그분은 사랑의 근원이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모본이시다.



출처 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누구나 알고 있는 주기도문이지만<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누구나 알고 있는 주기도문이지만


기독교 특유의 사상과 교리적 색채가 물씬 느껴지는 주기도문
주기도문은 전 세계 초교파적으로 암송되고 있는 기도문이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도시대부터 지금까지 2천년 동안이나 매 예배때마다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천국 소망을 각인시키면서 읊어지고 있다.


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마태복음 6:9~13)


그런 가운데 오랜 세월 숨겨지고 감춰져 왔던 주기도문 속의 극비사항이 예언의 때를 따라
이 사람 저사람의 입소문을 통해 전 세계 곳곳으로 널리 퍼지고 있다.
종교계 기득권층의 거부와 박해에도 좌절하지 않고 온갖 편견과 모함을 극복하고 
고정관념의벽을 뛰어 넘어, 예수님의 새이름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 성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요한계시록 3:12)



…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10)


오직 위(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어머니 하나님의 실체는 존재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과 신선한 충격일 뿐 아니라 오랜 전통과 
상식을 뒤집는, 인류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화젯거리일 수밖에 없다. 
화석처럼 굳어진 편견과 낡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의식을 깊은 잠에서 강렬하게 
깨워주는 자명종이라고도 할 수 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녀들과의 관계를 가족의 핵심인
 ‘아버지’라는 단어를 먼저 지정하여 특별호칭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한 분인 것을 의미한 것일 뿐, 
예언적 시기상 아직 거론할 수 없는, 또 다른 한 분의 존재를 포함해서 표현된 것이 아니다.


사전에서는 ‘아버지’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자기를 낳아 준 남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혹은, 
“자녀를 둔 남자를 자식에 대한 관계로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기를 낳아 준 남자, 자녀를 둔 남자가 바로 아버지인 것이다.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인들 중 얼마나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에서 남성 형상의 이미지를 의식하거나 떠올려 보았을까?


실제 필자는 실험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 
“아버지 하나님을 머릿속에 그릴 때 어떤 형상이 떠오르는가? 남성 형상의 모습을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라고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그냥 호칭상 아버지일 뿐이지,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남성이니 여성이니 따지는가?” 하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아버지라는 단어의 근본 의미조차 상실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남성 형상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 결코 여성 형상의 어머니 하나님을 수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그냥 하나님의 별칭이나 대명사 정도로 
아버지라고 부르면 되는 것이지 남성, 여성을 왜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하나님과 자녀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아버지’라는 호칭의 의미는 
함부로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다른 존재로 대체할 수도 없고 타인이 대신할 수도 없다.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의 자녀들을 두신 ‘남성’ 형상의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성’ 형상의 하나님이신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영원불변의 진리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모르거나 무관심한 것은 마치 
자신의 근원도, 고향도, 부모도, 형제도 무시하고 부정하는 반항아와 다를 바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판으로 손꼽는 솔로몬 왕의 명재판을 생각해보라. 그의 생애 동안 수없이
 많은 재판을 진행했을 터인데, 성경에 유일하게 기록된 재판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모성본능을 통해 진실과 거짓을 파헤친 이 사건은 온 인류에게 어머니의 존재와 역할을 
묵시적으로 깨우쳐주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를 가진 자만이 주기도문 속 비밀인 하늘 어머니의 존재를 깨달으리라.



출처 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15일 월요일

*위가 두 개인 개미*

위가 두개인 개미


하루는 신문에서  '지구상에 살고 있는 개미들의 총 무게는 얼마나 될까?'
하는 제목으로 개미의 생태계가 실린 흥미로운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해답은 놀랍게도 지구상에 살고 있는 전인류의 총 무게와 같다고 합니다. 


가히 상상치 못했던 수치의 기사를 읽으며 저는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체 어떠한 특성과 요소가 있기에 
그와 같이 무리를 이루는 번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는 사람을 통하여 인터넷으로 개미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개미가 엄청난 무게의 수치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은 독일의 생태학자들이 실험 연구한
 사실을 토대로 한 것인데 브라질 열대 밀림 속에서 사는 모든 동물들을 
거대한 저울에 올려 무게를 달아본다는 가정하에 연구해 본 결과 
흰개미를 포함한 전체 개미가 밀림 전체 동물의 중량 중 약3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는 개미의 부지런한 근면성이 있는 것도 요인이지만 가장
 큰 요인은 개미는 작지만 사회성이 발달한데다 수가 워낙 많기 때문이기도 하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의 관심을 끈 개미의 기사는 
개미에게는 위(胃) 가 두 개나 있다는 점입니다.

 각 생물마다 소화 기관과 먹이를 저 는 방식은 다르지만 
개미의 경우 심장과 모이 주머니, 전위, 중장과 직장,그리고 항문과 기타 기문,
말피기씨관,두푸르샘,독샘, 저장낭이 있는데 
그 외에도 먹이를 임시 저장하기 위한 가짜위가 있다나요?


그 가짜 위를 영어로 크라프(Crop : 거둬들인 수확을 의미함) 또는 크러프라고 하는데 
이 두 개의 위(胃) 중에서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평소에 모아온 꿀과 양식을 저장하였다가 배고픈 동료들에게 
입을 통하여 양식을 나눠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배가 고픈 개미가 동료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게 되면 위에 저장해 농은 양식을 
되새김질하듯 내어 먹여주는 이 생존을 위한 생태계의 신비는 
실로 저의 마음에 크나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생활을 할 때나 혼자만 가는 천국이 아니기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서로 사랑하고 위하며 나눠줄 줄 아는 그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생명의 양식을 자신을 위해서만 쌓지 말고 시온의 가족 된 내 형제자매를 위해서도 
저장하고 준비해야 함을 말입니다. 
나 자신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잘 깨닫고 이해하여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하늘나라 갈 수 있도록 손잡아 주는 것!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닐까요?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우리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내 양을 먹이라’ 는 음성을 기억하며
 영의 양식이 결핍되어 시들하게 죽어 가는 영혼들이 없는지 살펴봅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한마음이 되어 진정한 사랑의 꽃을 피우는 
시온의 향기들이 다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구 소식지 '십사만사천지 23호]



이교주의의 혼합물=크리스마스(성탄절)

이교주의의 혼합물=크리스마스(성탄절)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의 합성어다. 
흔히 그리스도의 뜻을 기리기 위한 의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이때 행해지는 의식은 예수님의 
생애나 가르침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교도에서 유입된 잡다한 의식의 혼합물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그의 저서에서 
“전 로마와 그리스에서 12월 25일을 공휴일로서 
축하하는 최대의 이교 예배는 이교 태양신 예배인 미트라 종교였다. 

이 동계 축제를 탄생 즉, 태양의 탄생이라고 불렀다”고 밝혔다.


결국 태양신의 탄생일이 기독교 내로 유입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둔갑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크리스마스 때 카톨릭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의식들이 태양신교의 의식과 닮아
 있을 수 밖에 없다. 태양신교의 의식 중 12월이 되면 3대 축제가 열렸는데, 
기독교가 그 풍습 또한 그대로 들여왔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주고 받는 풍습은, 3대 축제 중 하나인 시길라리아(Sigillalia) 제일에 
어린아이에게 인형과 같은 선물을 나눠주는 풍습을 계승한 것이다. 
며칠 동안 환락을 즐기는 것도 사투르날리아(Saturnalia) 제일의 모습 그대로다.





태양신교의 사상은 크리스마스 트리와도 연관이 있다.
고대 바벨론 전설에 따르면 한 상록수가 죽은 나무 그루터기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새로 솟아난 상록수가 죽은 태양신 니므롯이 그의 아들 담무스 안에서
회생한 것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이 외에도 이집트, 로마 등 여러 국가에서 사철 푸른 나무,
일명 거룩한 나무에 대한 샤머니즘적인 숭배사상이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새해가 되면 악마를 물리치기 위하여 집과 주변을 상록수로 꾸며왔던
 주술적인 신앙의 형대가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종려나무를 신성시했으며,
로마에서는 전나무를 거룩하게 구별하고 농신제 기간 동안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열매를
장식하며 태양신을 숭배하는 신앙적 행위로 기념해 왔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이러한 나무에 대한 사상를 재현한 것이다.



'Festivals, holy days and saints’ days'는 “
크리스마스 나무의 도금한 견과나 볼들은 태양을 상징하며 … 
동지절의 모든 축제는 크리스마스에 흡수되었고 … 
크리스마스 나무는 오딘(Odin, 스칸디나비아의 신)의 
거룩한 전나무에 바친 영예에서 온 것”이라고 기록했다.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산타클로스 역시,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다

270년경 소아시아 지방(지금의 터키)의 항구도시 파타라에서 
태어난 성 니콜라스(St. Nicholas)가 산타클로스의 효시다. 
니콜라스는 남몰래 많은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결혼을 하지 못하는 세 자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금 주머니를 굴뚝으로 떨어뜨렸고 금덩이는 벽에 걸어둔 양말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도움으로 세 자매는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이야기는 유럽으로 전해졌다.
12세기 초 프랑스의 수녀들이 니콜라스의 축일(12월 6일)의 하루 전날인 5일에
 성 니콜라스의 선행을 기념했고 이후 전 지역으로 이러한 풍습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당시 이들이 기념했던 니콜라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산타클로스의 모습과는 다르다. 
현재의 산타클로스는 영리 목적으로 조작된 것이며, 물론 그리스도와는 관계가 없다.
 “오늘날처럼 산타클로스가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다니는 모습으로 일반 사람들 앞에 등장한 것은
 1822년 성탄절 이브로, 뉴욕의 신학자 클레멘트 무어가 쓴 ‘성 니콜라스의 방문’이라는 
시가 효시였으며, 본래 날렵하고 키가 큰 모습에서 통통한 볼에 뚱뚱한 모습을 하게 된 것은 
토마스 나스트라는 19세기의 만화가가 20년 동안 잡지에 성탄절 삽화를 그리면서 완성한 것이다. 
또 현재처럼 빨간 옷을 입게 된 것은 1931년 미국 해돈 선드블롬이
 코카콜라 광고를 위해 그린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다(시사용어사전 2003).”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약 300년 후,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생일로 제정되면서 
이 같은 태양신 숭배 및 이교도의 풍습이 기독교화된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태양신 축제에 참여하고자 했더 부패한 기독교인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이해해볼 수 있다. 

크리스마스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풍습과 의식이 그리스도가 아닌
 태양신과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출처 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14일 일요일

수어드의 바보짓<하나님의교회 행복한 가정>




"얼음이 필요하다면 미시시피강의 얼음이 있지 않나요?"


"그렇게 거대한 아이스박스가 도대체 어디에 필요한 건가요?"


1867년,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였을때,
사람들은 매입을 주도했던 미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를 맹비난했다.


불과 720만 달러의 헐값에 거저 얻은 땅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알래스카는 쓸모없는 얼음땅일 뿐이었다.
그래서 수어드가 알래스카를 매입한 일을 '수어드의 바보짓'이라고 비꼬았다.



그러나 1896년 금광이 발견되면서 알래스카는 금싸라기 땅이 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때에는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더구나 석탄,목재에 이어 급기야 어마어마한 양의 유전까지 발견되면서 
미국의 경제에 큰 도움을 준 것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알래스카를 매입한 일에 대해 '수어드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을 준비하는 행복한 가정중에서-





세상 사람들 또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어리석고 헛수고하는 사람으로 볼지 모릅니다.
그러나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선택이 탁월한 선택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014년 12월 12일 금요일

광우병<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광우병


잊어버릴 만하면 들려오는 소식 중의 하나가 광우병이다.
지난 달 말, 포르투갈에서 1998년 태어난 숫소에게서 광우병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우리나라의 경우 2000년 12월 30일부터 포르투갈을 포함한
유럽연합에서 생산된 소나 쇠고기는 수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밝혔지만
그래도 찜찜한 마음은 지울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광우병은 소의 뇌에 변형이 일어나 생기는 전염성 질환으로,
공식명칭은 ‘우해면양뇌증(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이다.
 소의 뇌에 스펀지 같은 작은 구멍이 생기면서 조직이 흐물흐물해지는 병인데,
 소가 이 병에 걸리면 방향감각을 잃고 미친 것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일명 ‘광우병’이라 부른다. 
광우병에 걸린 소는 전신에 마비가 오고 시력을 상실하며 결국 죽음에 이른다고 한다.



광우병의 원인은 역학조사 결과, 초식동물인 소에게 먹인 ‘동물성’ 사료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양이나 동종인 소의 뼈와 부산물을 섞은 사료를 먹인 것인데, 
실제로 광우병이 최초로 발견된 영국은 1980년대 초부터 젖소의 우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양이나 소의 사체를 사료 원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섭취한 것이 화를 키운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광우병에 걸린 소를 사람이 먹게 될 경우 광우병에 감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변종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광우병이 사람에게 전염된 것으로 '인간광우병'이라고 불린다.

광우병에 걸린 소의 고기나 그 추출물로 만든 음식을 먹었을 때 감염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30대의 젊은 연령층에서도 발생하는데,
이 병에 걸리면 피로, 우울증, 운동장애, 경련, 
치매가 빠르게 진행되며 환자의 90%가 1년 내에 사망에 이른다고 한다.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음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영적으로도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고 생명수를 마셔야 한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며 유월절을 새 언약으로 약속하신 생명의 양식이 바로 그것이다
(요한복음 6:48).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14~20)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명령을 버리고 사람이 만들어놓은 계명을 지킨다면 
영적 광우병에 전염되고 말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유월절을 버리고 태양신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를 
지키고 있고,
 안식일을 버리고 태양신을 숭배하는 일요일을 지키며 더 잘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을 내겠다는 생각으로, 오랜 세월 사람의 계명을 지켜오고 있다.


초식동물이 풀을 먹어야 하는데도 먹지 못할 음식을 먹음으로써 
뇌에 구멍이 생겨 죽어가는 이치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어야 할 생명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변질된 사람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영혼이 병들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5:7~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계명과 소에게 있어 동물성 사료 같은 사람의 계명을 분별할 줄 
알아야할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으려면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철저히 가려 먹어야 할 것이다.



출처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11일 목요일

생명과의 길을 열어주신 초림예수님과 재림그리스도 안상홍님<하나님의교회>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성경을 허락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의 구원에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반드시 만나야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창세기에 기록된 에덴동산의 역사는 하늘에서 범되하고 이 땅에 떨어진 인류의 범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 속에 감추어진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면 인류가 짊어지고 있는 사망의 고리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허락된 사람들과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13장 10~16)

그렇다면 이 비밀을 알 수 있도록 허락된 사람들은 천국을 약속받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선악과의 범죄와 생명과


에덴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인류는 뱀의 미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창 2장 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3장 1~6절 “…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비유상의 뱀은 마귀를 뜻합니다(계 12장 9절 참고).
간교한 마귀는 사람의 심리적인 약점을 잘 알고 교묘하게 접근해 죄와 사망을 끌어들였습니다.
에덴의 범죄는 실상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지은 죄를 재구성하여 우리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은 아담과 하와처럼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는 선악과를 먹고 죽게 된 사람이라도 먹기만 하면 살 수 있는 생명과가 있었습니다.


창 3장 22~24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생명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룹들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유월절로 허락된 생명과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바로 생명과의 실체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요 6장 53~5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선악과를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인생들에게 유일한 복된 소식은 생명과를 먹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 영생을 가졌다”고 하셨으니 이는 곧 생명과를 허락하시겠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룹들로 하여금 죄인들이 생명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라고 명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시 생명과의 길을 열어 우리 죄인들을 살려주실 분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보배로운 살과 피를 통해 영생을 약속하신 예수님은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 유월절을 세우시며 생명과인 당신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고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6장 17~28절, 막 14장 12~24절, 눅 22장 7~20절 참고).


그러나 이 생명과의 진리를 싫어하는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해서 주후 155년, 197년 또 325년 세 차례의 논쟁과 종교회의를 거쳐 교묘하게 유월절을 없애버렸습니다. 동방교회에서 중시했던 유월절을 없애고, 서방교회를 중심으로 유월절 다음에 오는 첫 번째 일요일(부활절)을 기념하게 함으로써 날짜를 변경해 유월절을 지킬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하나님의 때와 법을 바꾸려 한다는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이루어졌습니다(단 7장 25절 참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단에 의해서 짓밟힌 생명의 진리, 새 언약 유월절을 장차 다시 오셔서 회복해주실 것도 알려주셨습니다.
수 세기에 거쳐 수없이 많은 신학자들이 연구해도 그들은 이 유월절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생명과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허락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과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 안상홍님




2천 년 전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목적도 우리의 생명, 곧 구원을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히 9장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그렇다면 두 번째 오시는 그리스도는 생명과의 진리인 유월절을 가지고 등장하시는 분이라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에덴동산으로부터 오늘날 마지막 성령시대까지 봉해져 있던 모든 비밀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천국의 비밀을 허락받지 못한 자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학사들은 알지 못했던 예수님을 어부들이 알아보았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 알아보았습니다. 낮고 천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아보고 올바르게 경배했던 그들이 축복받았던 것처럼 오늘날 이 시대에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있게 허락받은 우리는 정말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오래 저장되었던 포도주로 영생을 허락해주시는 그분을  우리의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사 25장 6~9절 참고). 

 325년 이후로 오랫동안 봉해졌던 새 언약 유월절을 다시  우리에게 찾아주신  안상홍님은 우리가  기다려온,   이 시대의  구원자이십니다.



선악과의 범죄로 하늘에서 쫓겨나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이 땅까지 오셔서 우리로 생명과를 먹을 수 있도록 천국의 비밀들을 모두 풀어주셨습니다. 생명과를 가지고 오신 우리의 하나님, 안상홍님께서 주시는 죄 사함의 축복과 영원한 천국으로 돌아갈 축복까지 모두 허락받으시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투는 내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말투는 내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같은 말도 듣기 싫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투가 퉁명스럽거나 거친 용어를 사용하거나
목소리가 유난히 공격적일 때 그런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말투가 좋지 않으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됩니다.


당신이 좋은 말도 퉁명스러운 말투로 하면
듣는 사람은 "나한테 화난 것일까?"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거친 말투는 당신의 의도와 다르게
"나를 겁주려는 것일까?"라는 메시지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말이란 내용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방법도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속마음과 달리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한다면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받을 것입니다.






말투란 말을 담는 그릇입니다.
물을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세숫물로 보이기도 하고 먹는 물로 보이기도 하듯
말투는 그 나름대로 독립된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의교회 사람들은
어머니교훈처럼 큰그릇이 되기위해 노력합니다.
형제에게 한 모든것이
결국은 내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왜 나야?!





흑인 선수로는 최초로 미국 메이저 테니스대회에서
우승한 아서 애시 (1943~1993)


인종차별이 심한 버지니아에서 가난한 경비원의 아들로 태어나
두 번이나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입니다.


심장질환으로 은퇴한 후 코치,방송해설가,자선사업가,
흑인과 빈곤층 어린이를 위한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던 
그는  심장수술 때 받은 수혈로 
에이즈에 감염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더욱 활발히 사회활동을 했습니다.


"애시, 왜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렇게 무서운 질병을 주셨을까요?
하늘이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누군가 이렇게 물었을 때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메이저 대회 우승컵을 들었을 때 "왜 나야?'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왜 나야?'라고 묻지 않겠습니다.
나의 고통에 대해서 '왜 나야?' 라고 묻는다면
내가 받은 은총에 대해서도 '왜 나야?'라고 물어야 할테니까요."



-<엘로히스트에게 띄우는 편지> 중에서-




시련은 '축복'의 다른 이름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시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불뱀과 전갈이 있는 고통의 광야길을 걷게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낮추고 시험하여 마침내
그들에게복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시련을 겪느냐보다 시련에 대처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내게 주어진 시련이 축복임을 깨달을 때
내 인생은 불행에서 참된 행복으로 바뀝니다.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메멘토 모리<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 말은 '죽음을 기억하라','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옛적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뒤따라오게 하며 이렇게 외치도록 시켰다고 한다. 한껏 승리감에 도취되고 기쁨으로 고무된 개선장군에세 찬물을 끼얹는 소리인 셈이다.


그들의 행위가 범상치 않게 느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은 이렇게 개선가를 부르고 있지만 언젠가는 너도 죽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겸손하게 살라는 교훈을 심어주기 위한, 의미심장한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는 인류 최대의 이야깃거리이자 수수께끼다. 그래서 그리 많은 철학자들이 생겨난 건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의 논제는 삶이란 무엇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다, 죽음이란 무엇이다 등 대개가 인생이다. 철학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인생관을 타인에게 설파해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 제시해주기도 한다.


과연 성공한 인생은 어떤 것일까. 세상에 태어나 누구는 부(富)를 축적하는 것으로, 누구는 권력을 누리는 것으로, 누구는 이름을 알리는 것으로 성공했다고 말한다. 세간에 오르내리는 성공스토리의 주인공들이 그룹총수 혹은 매출깨나 올리는 사업가, 정치인, 유명인 일색인 것을 보면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의 성공스토리는 뭇 사람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스토리의 주인공을 롤모델로 삼고 사업전략을 짜거나 정치노선을 바로잡거나 생활습관을 바꾸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성공스토리의 주인공처럼 살게 될지도 모른다. 떼돈을 벌 수도 있고, 유명해질 수도 있고, 권력을 손에 쥘 수도 있다. 그러나, 찬물 끼얹는 소리를 안 할 수가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죽을 때 그것들을 갖고 갈 수도 없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제아무리 엄청난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졌던 사람일지라도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역사를 뒤흔들었던 제왕들은 어떠한가. 굴지의 기업을 이끌며 부를 거머쥐었던 기업가들은 어떠한가. 살아생전 그들이 소유하던 것을 영원히 갖고 산다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듯이 말이다. 공수래공수거는 불변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법칙이다. 한평생 쌓아온 공을 영원히 가지지 못하는 인간은 불행하고 불안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왕조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깨달은 것은 의외의 것이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서 1:2~3, 14)







부와 명예와 권력을 모두 가졌던 솔로몬은 열심히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성공가도를 달렸다고 할 만한 그가 남긴 말은 ‘내가 모든 것을 가져봤는데 다 헛되고 부질없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삶이 진정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원히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편 103:15~1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고, 하나님의 법을 기억하여 행하는 사람에게 영원히 인자를 베풀겠다고 하셨다. 즉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주시겠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데다 영원한 생명까지 받는다면 금상첨화인 인생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솔로몬의 충고를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것이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1, 7~8)


출처 패스티브닷컴



2014년 12월 9일 화요일

크리스마스(성탄절)은 태양신의 생일날

태양신의 날 크리스마스(성탄절)




하나님의교회는 사람이 만든 계명은 절대 지키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든 계명은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고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의 계명으로는 일요일예배,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경대로 안식일, 유월절 등 3차 7개절기 등 하나님의 계명을 소중히 지키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 그리스도(Christ) + 마스(mass)

크리스마스는 중세 카톨릭용어로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12월 25일만 되면 거리 곳곳에서는 캐롤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즐거워하지만

크리스마는 본래 교회가 세속화되던 4세기경 이교도의 축제일을 받아들여 

기독교의 축제일로 바꿔치기한 우상숭배입니다.



<교회사 174쪽, 이건사 발행>

성탄절 :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지킨 것은 354년의 기록에 나타났으니, 
곧 로마감독 리베리우스(Liberius)시대였다.
 379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시에서 축하하였고 애굽과 팔레스타인에 전파되었다.
 크리스마스의 기원을 특기하자만 
그 풍속이 로마에서 일어난 것이니 그 자체가 이런 것이다. 
로마에는 12월 말에 들어서면서 연거푸 삼대 축제일이 있은 것이다.


그 하나는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12일부터 24일까지 지킨 것이다.
 잠시 다른 신이 지배할 때에 황금시대를 이루었는데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축하는 것이다. 
이 절기에는 빈부귀천의 구별을 망각하고 환락에 취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길라리아(Sigillalia)제일이 있으니
 12월 하순에 있은 것으로 이 때에는
 소아에게 인형을 주어 즐기게 하는 절기인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브루말리아(Brumalia) 제일이니
 이것은 동지제(冬至祭)로서 태양의 떠오름을 축하하는 절기였다.


이런 축제일에 가담할 수 없는 기독교인들로서는 별다른 의미로 축하하는 집회를 
모색하게 된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태양이 나온 후에 탄생하셨다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되어서 이 때로 크리스마스를 삼아 축하하는 풍이 시작하게 된 것이니
 이것이 곧 구주 강탄 축하의 시작인 것이다.




100년 이전에 기록된 신약성경에 354년부터 지키기 시작한 크리스마스가 

기록이 되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으며,

예수님과 사도들 역시 크리스마스는 지킨 일이 없습니다.

성경대로 행하는 하나님의교회로 오셔서 값없이 구원받으세요.





물의 5가지 가르침<하나님의교회&좋은글>


물은


1.항상 자기의 진로를 찾아 멈추는 일이 없다.


2.스스로 움직여 다른 것을 움직인다.


 3.장애를 만나면 그 세력을 몇배로 한다.


 4.스스로 맑으려 하고, 다른 것의 더러움을 씻고,
 부탁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다.


5.양양한 대해를 채우고, 비가 되고 구름이 되고,
 얼어서 영롱한 얼음이 되지만, 그 성질은 잃는 법이 없다.





물은 항상 낮은대로 찾아 흘러갑니다.

낭떠러지를 만나도 결코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물을 만나든지 모두 다 맞추어줍니다.

그 모습은 시시때때로 변하지만 그 본질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물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피하지 말고 부딪혀 이겨내고

어떤 형편 가운데 있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누구를 만나든 어울리지만 결코 마음만큼은 변함없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두 척의 배<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닷컴>

두 척의 배



여기 두 척의 배가 있다.
한 척은 요나의 배요. 또 다른 한 척은 바울의 배다.
두배의 차이가 무엇일까.
먼저 요나의 배를 보자.
요나는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향했다.
요나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앗시리아.
그것도 우상이 창궐한 니느웨로 가서 재앙을 선포한다는 것이 어쩌면 무모한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공연히 그곳에서 몰매를 맞느니 그냥 피하고 볼 심산이었던 것이다.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오르자 요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잠이 들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요나 1:1~7)


하지만 갑자기 폭풍을 만난 배는 위기에 처했고 배에 탔던 사람들은 이 일이 어찌된 영문인지 
제비를 뽑았다. 결국 요나는 들통이 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요나를 물속으로 내던졌고 폭풍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그렇게 요나를 버리고서야 배는 무사히 다시스로 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바울과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은 어찌됐을까. 
바울은 당시 로마로 압송돼 몇몇 죄수와 함께 배에 올랐다. 
이탈리아로 향하던 중 배는 ‘위험한 동북풍’이라는 뜻의 태풍, 유라굴로를 만났다. 
사람들은 짐을 바다에 던졌고 배의 장비마저 내던졌지만 태풍은 잠잠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바울이 말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사도행전 27:21~26)


결국 바울과 함께 승선했던 모든 사람들은 인근의 섬으로 피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던 요나와 함께했던 사람들은 요나를 버림으로 살 수 있었지만, 
바울과 함께했던 사람들은 바울 때문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두 척의 배에 탔던 사람들의 결과를 통해 오늘날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해야 한다.
 혹시 내 믿음의 배에 요나와 같은 사람이 있는지, 바울과 같은 사람이 있는지 말이다.
만약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요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과감히 그 사람을 버리는 것이 당신의 생명을 구하는 길이다.


하나님을 믿지만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일까. 
요나처럼 직접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사례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규례, 계명들을 
따르지 않는 것도 해당된다. 즉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계명인 안식일, 유월절, 침례, 여성도의 머리수건 등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성경에도 없는 일요일예배,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맥추감사절 등 사람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례들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요한계시록 22:18~19)


천국을 향하는 믿음의 배에 누가 동승하고 있는지 잘 살펴서 요나의 배에 탔던 사람들처럼 
받지 않아도 될 재앙을 받는 일이 결단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출처 패스티브닷컴